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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에서 수면이 단순한 휴식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미국 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 연구팀은 기존의 수면 보조제인 ‘렘보렉산트(lemborexant)’가 뇌 속의 비정상적인 타우(tau) 단백질 축적을 줄이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염증성 신경 손상을 완화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Nature Neuroscience)’에 게재됐다.


연구팀은 유전자 조작으로 알츠하이머 유사 뇌병증을 유도한 실험용 생쥐를 대상으로 렘보렉산트를 투여했다. 그 결과, 수면의 질이 향상된 생쥐군은 해마(기억 형성에 핵심 역할을 하는 뇌 부위)의 부피가 약 30~40% 더 크게 유지됐고, 타우 단백질의 응집 및 신경세포 사멸도 유의미하게 감소했다. 반면, 동일 조건에서 졸피뎀(zolpidem)을 투여한 그룹은 수면 시간은 늘었지만 뇌 보호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수면 시간이 아닌, 수면의 ‘질’과 수면에 관여하는 생체 기전이 신경 보호에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렘보렉산트가 작용하는 ‘오렉신 수용체(orexin receptor)’는 수면-각성 주기를 조절하는 주요 신경 전달 시스템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수용체를 차단하면 각성을 유도하는 오렉신 신호가 억제돼 깊고 지속적인 수면이 가능해진다.


타우 단백질은 정상적으로는 신경세포의 구조와 기능 유지에 관여하지만, 지나치게 인산화되면 응집되어 염증과 세포 사멸을 유발한다. 연구진은 렘보렉산트가 오렉신 수용체를 차단함으로써 타우 단백질의 과도한 인산화를 방지하고, 이를 통해 신경세포의 기능을 보존하는 기전을 규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효과가 주로 수컷 생쥐에게서만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점으로, 연구진은 암컷 생쥐에서는 유전적으로 신경퇴화가 더 적게 발생했기 때문에 약효가 상대적으로 덜 관찰됐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번 연구는 알츠하이머뿐 아니라 진행성 핵상 마비, 피질기저핵 증후군, 일부 전두측두엽 치매 등 다양한 타우 관련 질환에 적용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가 크다. 연구 책임자인 데이비드 M. 홀츠먼(David M. Holtzman) 교수는 “현재 사용 중인 항아밀로이드 항체치료제는 질병의 진행을 근본적으로 늦추기엔 한계가 있다”며 “아밀로이드와 타우를 동시에 표적하는 복합 치료 전략이 향후 주요 연구 방향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 FDA는 현재 렘보렉산트를 포함한 오렉신 수용체 길항제 계열 수면제를 총 3종 승인한 상태로, 이번 연구를 계기로 이들 약물이 신경보호제 또는 예방약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수면의 질을 높이는 것이 곧 뇌 건강을 지키는 일이라는 과학적 근거가 마련되면서, 퇴행성 뇌질환의 예방 전략에 수면약물이 하나의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