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겪은 학대나 방임 등 트라우마가 성인이 된 이후 우울, 불안, 자살충동 같은 정신건강 문제로 이어지는 데에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영국 리즈대학교 심리학과 연구팀은 최근 PLOS One에 발표한 논문에서, 아동기 트라우마가 성인기 우울증, 불안, 좌절감, 자살위험 요소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 분석했다. 특히 스트레스 평가(stress appraisal)와 인지된 스트레스(perceived stress)가 이 연관성을 어떻게 매개하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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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이번 연구는 평균 연령 38세의 성인 273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진행됐다. 연구 참가자는 첫 번째 세션에서 아동기 트라우마 경험, 사회적 지지 수준, 주관적 사회경제적 지위, 자살 관련 경험 등을 설문으로 응답했고, 두 번째 세션에서는 일상 스트레스 평가, 스트레스 인식, 우울·불안 증상, 좌절감 및 속박감(탈출 불가한 느낌)에 대해 평가했다.


그 결과, 아동기 트라우마에 많이 노출된 사람일수록 우울과 불안, 좌절, 속박감을 평균적으로 15~35% 더 높게 보고했다. 특히 이들 중 상당수는 일상적 스트레스 상황을 더 위협적으로 인식하고, 전반적인 스트레스 수준도 더 높게 나타났다.


연구팀은 통계적 분석을 통해 아동기 트라우마가 성인기 정신건강 문제로 이어지는 경로에서 스트레스 인식과 평가가 유의미한 매개역할을 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다시 말해,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경험한 이들은 사소한 일상의 어려움조차 더 크게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정서적 고통이 증폭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사회적 지지, 주관적 사회경제적 지위, 자살 관련 경험이 이 관계를 조절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개인의 환경적 요인보다, 스트레스를 인지하고 해석하는 인지적 방식이 더욱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논문을 이끈 카루아나 박사는 “치료 현장에서 흔히 증상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지만, 트라우마 생존자에게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인식하고 반응하는지를 훈련하는 접근이 함께 필요하다”며 “인지행동치료나 스트레스 관리 중심 개입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된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아동기 트라우마의 장기적 영향을 정량적으로 입증한 동시에, 일상의 사소한 스트레스 자극이 어떻게 심리적 위기로 확대될 수 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정신건강 중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단순히 외부 사건이 아닌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