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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우리의 장(腸)은 단순히 음식물을 소화하는 기관이 아니다. 수많은 신경세포가 얽혀 형성된 ‘장 신경계(enteric nervous system, ENS)’는 제2의 뇌라 불릴 만큼 복잡하고 정교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이 ENS가 음식 알레르기나 기생충 감염, 장내 세균 변화 같은 외부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세계 최초로 체계적으로 규명한 연구가 발표됐다.


미국 매사추세츠종합병원(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 분자생물학과 람닉 자비어(Ramnik Xavier) 박사 연구팀은 최근 사이언스(Science) 에 “Regional encoding of enteric nervous system responses to microbiota and type 2 inflammation(장 신경계의 미생물 및 제2형 염증 반응에 대한 지역별 코드화)”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연구는 매스 제너럴 브리검(Mass General Brigham)과 브로드연구소(Broad Institute)의 공동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그동안 ENS는 장 운동과 소화 기능을 조절하는 역할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ENS가 면역계와 밀접히 상호작용하며, 세균이나 알레르기, 기생충 감염 등 다양한 자극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면역 조율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연구팀은 장내 환경이 각기 다른 생쥐 모델을 활용했다. 일부는 무균 상태(germ-free)로, 일부는 특정 미생물 군집을 보유한 상태로, 또 다른 일부는 알레르기 항원이나 기생충에 노출된 상태로 설정했다. 이후 장의 각 구역별로 신경세포를 추출해 반응 양상을 정밀 분석했다.


이를 위해 연구진은 핵에 형광 표지를 삽입한 생쥐 모델을 개발했다. 이 덕분에 장 조직 속에서도 신경세포의 핵이 빛을 내 구분이 가능해졌고, 개별 세포 단위로 유전자 활동을 분석할 수 있었다. 기존 기술로는 포착하기 어려웠던 희소 유전자까지 포함해, 한 세포당 평균 6000개 이상의 유전자가 관찰됐다.


그 결과, ENS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반응 패턴을 보였다. 하나는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 신경세포 그룹으로, 면역 반응 시 분비되는 다양한 사이토카인 신호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특히 알레르기나 기생충 감염 상황에서 이들 감각 신경의 수가 크게 변했으며, 면역세포와의 교신이 활발히 일어났다.


또 다른 부류는 장의 연동 운동을 담당하는 운동 신경세포로, 유전자 발현의 변화 폭은 상대적으로 완만했지만 환경 변화에 따라 세밀하게 기능을 조정하는 특성이 관찰됐다. 즉, ENS가 전체 장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각각의 역할에 맞게 유연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 반응 패턴은 무균 상태, 알레르기, 기생충 감염 등 전혀 다른 조건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났다. 이는 장 신경계가 외부 변화에 상관없이 장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조절 시스템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진은 이어 바이러스 매개 유전자 편집 기술을 활용해 특정 유전자를 제거한 뒤, ENS가 어떻게 반응을 바꾸는지도 관찰했다. 이를 통해 장 신경의 유전자별 역할과 면역 반응 조절 기능을 더욱 명확히 규명할 수 있었다.


자비어 박사는 “이번 연구는 장 신경계가 단순히 소화를 조절하는 기계가 아니라, 면역 반응과 대사 균형을 유지하는 ‘통합 센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며 “ENS의 유전자 지도는 향후 염증성 장질환, 알레르기, 심지어 뇌-장 연결 질환 연구에도 토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팀은 앞으로 인간 장 조직과 오가노이드(인공 미니 장기) 모델을 활용해, 동물실험 결과가 실제 인체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하는지를 검증할 계획이다. 또한 ENS의 염증 반응 변화가 뇌와 연결된 신경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즉 장 염증이 식욕 조절이나 정서 변화와 같은 뇌 기능에 어떤 파급효과를 주는지도 연구할 예정이다.


이번 연구는 장 신경과 면역 시스템의 정교한 대화를 해독함으로써, ‘장이 뇌를 지배한다’는 말의 과학적 근거를 한층 강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