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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암세포는 정상세포가 버티기 어려운 저산소·산화스트레스·고온 환경에서도 생존하며 조직을 확장한다. 오랫동안 연구자들은 이러한 극단적 환경을 암세포가 어떻게 ‘이점’으로 바꾸는지에 주목해 왔다. 최근 미국 록펠러대학교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는 그 해답이 세포 핵 속 전사 과정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스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사 조절에 관여하는 MED1 단백질의 화학적 변화가 암세포의 스트레스 내성과 성장성을 크게 강화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연구는 네이처 케미컬 바이올로지(Nature Chemical Biology)에 게재됐다. 연구진은 “기존에 알지 못했던 전사 단계의 조절 메커니즘을 규명한 것으로, 스트레스 환경에서 암세포의 생존 전략을 차단할 수 있는 새로운 치료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의 제1저자인 록펠러대학 Ran Lin 연구원은 “MED1 조절체계가 특정 암세포에서 강하게 활용되고 있었으며, 이를 차단하면 스트레스 적응 능력을 흔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사 과정은 RNA 중합효소Ⅱ(Pol II)가 유전 정보를 읽어 단백질 생산의 첫 단계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 단계는 30여 개의 단백질이 모여 구성된 ‘미디에이터(Mediator)’ 복합체에 의해 조율되며, MED1은 이 구성요소 중 하나다. 특히 MED1은 호르몬 신호를 통해 유방암, 특히 에스트로겐 수용체 양성(ER+) 유방암의 성장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먼저 MED1이 아세틸화되는지를 분석했다. 아세틸화는 단백질 기능을 조절하는 중요한 화학적 변화인데, 종양 성장과 약물 저항성에도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Lin 연구원은 “아세틸화 여부가 MED1의 성질을 바꿀 수 있다면, 스트레스 환경에서 이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세포에 저산소·산화스트레스·열 스트레스를 부여한 결과,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MED1에서 아세틸기가 제거되는 ‘탈아세틸화(deacetylation)’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작업을 담당하는 단백질은 SIRT1이었다. 탈아세틸화된 MED1은 Pol II와 결합하는 능력이 강해지며, 스트레스 방어 유전자 활성화에도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어 연구팀은 MED1에서 특정 아세틸화 부위를 제거한 변형 단백질을 유방암세포에 도입했다. 그 결과 자연적으로 탈아세틸화된 경우와 동일하게, 이 변형 MED1을 가진 암세포는 스트레스 환경에서도 높은 생존력과 빠른 종양 성장을 보였다. 정상적인 아세틸화 기능이 없는 MED1일수록 암세포의 스트레스 적응성과 공격성이 강해진 셈이다.

 

연구팀은 “MED1의 아세틸화·탈아세틸화가 일종의 전사 스위치로 작동해 세포의 유전자 발현 방향을 재조정하고, 스트레스 환경에서도 암세포가 살아남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ER+ 유방암뿐 아니라 스트레스-적응적 성장 전략을 가진 다른 암종에서도 활용될 가능성이 있어 치료 타깃으로서 의미가 크다.

 

연구를 이끈 Robert Roeder 교수는 “이번 결과는 아세틸화가 전사 인자를 조절하는 넓은 생물학적 패러다임에 속한다”며 “p53 연구에서 출발한 이러한 이해가 앞으로 더 많은 치료 표적을 발견하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기초 연구가 결국 혁신적 치료 전략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을 다시 증명하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번 성과는 스트레스 환경을 ‘버티는’ 수준을 넘어 이를 ‘활용’해 성장하는 암세포의 적응 전략을 처음으로 분자 수준에서 설명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연구진은 앞으로 MED1 조절 경로를 차단하는 약물 개발 가능성도 검토할 계획이다. 특히 기존 호르몬 치료에 내성이 생기는 ER+ 유방암에서 새로운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 후속 연구가 활발히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