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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애리조나주립대(ASU) 연구진이 수십 년간 암의 공격성을 판단하는 지표로 활용돼 온 단백질 ‘SerpinB3’가 사실은 인체의 자연적인 상처 치유 과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동안 피부·폐 등 장벽 조직이 손상됐을 때 나타나는 스트레스 표지자로만 알려졌던 이 단백질이, 손상된 조직을 복구하는 생리적 장치로도 기능한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연구 결과는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렸다.


미국에서는 매년 약 600만 건의 피부 상처가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당뇨병, 고령, 감염, 화상 등과 관련된 만성 상처는 치료가 더디고 관리가 까다로워 연간 200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 부담을 초래한다. ASU 바이오디자인센터 연구팀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바이오소재 연구의 과정에서 SerpinB3가 상처 회복에 관여한다는 점을 포착했다.


연구팀은 생체 활성 나노소재가 상처 회복을 촉진하는 과정에서 SerpinB3가 꾸준히 증가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상처 부위에서 활성화되는 유전자들을 분석한 결과, 피부가 손상될 때 SerpinB3 발현이 급격히 증가하고, 특히 첨단 생체 소재 드레싱을 적용했을 때 그 수준이 더 높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를 통해 SerpinB3가 인체가 진화 과정에서 확보한 상처 치유 메커니즘의 일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험실 연구에서 SerpinB3를 추가로 공급하자 피부세포인 케라티노사이트의 이동 속도가 빨라졌고, 실제 상처가 메워지는 속도도 향상됐다. 이는 상피세포 성장인자로 알려진 EGF와 유사한 수준의 치유 촉진 효과로 평가된다. 연구진은 SerpinB3가 세포 부착을 느슨하게 만들어 이동성을 높이고, 상처 주변으로 빠르게 이동해 조직을 재구성하도록 돕는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콜라겐 배열이 규칙적으로 정돈돼 피부 강도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구조적 지지체도 강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SerpinB3는 1977년 자궁경부암 조직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폐암, 간암, 피부암 등의 예후를 판단하는 표지자로 널리 사용돼 왔다. 높은 농도로 검출되면 일반적으로 공격적인 암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암 지표 단백질’로서의 역할이 강조돼 왔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이 단백질이 암뿐 아니라 상처 회복의 기본적인 생리 과정에도 참여한다는 ‘이중적 기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연구진은 SerpinB3의 정상적인 역할이 이제야 밝혀진 이유에 대해 “그동안 암 연구에 집중된 탓에 본래 기능을 관찰할 계기가 부족했다”고 설명한다. 특히 치유 중인 피부 조직에서 SerpinB3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은 이 단백질이 염증성 피부질환, 천식 등 다양한 병리적 상태와도 관련돼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향후 SerpinB3는 난치성 상처 치료에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SerpinB3 활성을 높이면 상처 치유 속도를 앞당길 수 있으며, 반대로 암세포가 이 단백질을 이용해 전이를 촉진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SerpinB3 억제를 통한 항암 전략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 연구진은 현재 SerpinB3가 다른 질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추가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번 연구는 상처를 치유하는 인체의 고유한 기전이 암세포에도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상처·염증·암을 연결하는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